김상민 간사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묵상!
하루의 시작은 묵상과 적용으로! 그런데 말씀이 너무 어렵다구요? 제주 열방대학 성경연구센터에 계시는 김상민 간사님이 여러분의 묵상에 도움이 될 성경 이야기로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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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독자!
성경의 각 권을 맨 처음 받아 보았던 독자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66권의 성경은 각각의 시대를 살았던 원독자의 언어로 그들의 문화와 지리적 배경속에서 그들이 처한 상황 가운데 쓰여졌습니다.
마태복음의 원독자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의 유대인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간의 역사적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소위 중간사라 불리우는 시간이었는데 이 시기는 국제질서의 “격변기”였으며 정복과 억압이 되풀이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기간의 특징은 아래 구절이 잘 설명해 줍니다.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헛된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하박국 2:13)
이 시간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벨론 ~ 페르시아 ~ 알렉산더의 제국 ~ 헬라제국(톨레미와 셀류키드) ~ 마카비왕조 ~ 로마에 이르는 제국의 역사의 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400년의 중간사를 받아들이는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입장 차이
이어서 하박국은 역사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립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하박국 2:14)
400년 중간사의 결과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지식이 세상에 가득해진 것입니다. 신약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들고 이 하나된 세계, “그레꼬 로망(헬라의 문화와 가치와 로마의 제도와 통치)”의 세계에 복음을 전파합니다. 중간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세계를 향해 퍼져나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신약의 이방인들에게 기록된 책들에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이 중간사의 시간은 좀 다른 측면으로 다가옵니다. 유대인들에게 중간사는 침묵의 시간이었습니다. 말라기 이후 세례요한까지 선지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통로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침묵기입니다.
바꿔 말하면 유대인에게 중간사는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간절히 기다렸던 시간이었습니다. 제국의 역사를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간절했을까요?
간절함이 깊어질수록 커져가는 서로 다른 기대감들
기다림에 소망이 넘치고 넘쳤던 것을 메시야 대망 사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소망하며 메시야를 기다리는 생각들은 이후에 메시야가 오시면 우리에게 어떻게 해주실지를 기대하고 상상하게 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고난을 견디게 해주고 제국의 억압 속에도 믿음을 지키는 견인차가 되기도 했었을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될거야! 메시야가 오시면 ~해주시겠지! 우리가 이렇게까지 기다리는데 이 정도는 해주셔야지… 그렇게 유대인들 안에도 기다리는 입장이 조금씩 달라져가게 됩니다.
바리새인은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사두개인은 사두개인의 입장에서, 열심당은 열심당의 입장에서, 에세네파는 에세네파의 입장에서 메시야를 아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구약에 언약이 성취될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입니다.
예수님을 거절했던 유대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쓰인 책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했던 사람들입니다. 왜?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가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에서 구원하고 죄인을 용서하는 메시야가 아닌 현실을 바꾸고 제국의 역사를 뒤집을 왕을 기다렸습니다. 유대인이니까요. 언약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였으니까요.
예수님을 거절한 유대인들이 이제 시작된 신약의 교회를 거절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대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교회가 자신을 하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죠. 우리의 언약인데 자기들의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시작한 교회를 향한 유대인의 반감 역시 생각해 볼만한 문제입니다. (*사도행전 안에 나타나는 유대인들의 박해를 기억해 봅시다.)
마태복음의 족보, 누가 하나님의 백성일까요 ?
언약 백성=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을 유대인답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해주신 것이 유대인의 정체성입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유대인의 족보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되어 다윗왕에게 이어지는 족보, 가장 유대인다운 족보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이 족보 속에서 선택적으로 등장시키는 여인들을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 먼저 언급된 세 여인이 이방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그들은 언약 밖에 있었지만 신실함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 언약에 대한 태도를 통해 언약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태도의 결과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얻어내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그녀의 이름은 밧세바였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이름을 감추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소개합니다. 원독자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건이었으니 이렇게 소개해도 원독자들은 밧세바를 바로 떠올릴 수 있었겠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야의 아내라고 소개한 것은 수치스러운 죄의 기억을 특별히 강조하면서 끄집어 내는 것 입니다.
“민수기 35:31은 고의로 살인죄를 범한 살인자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라고 전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지은 다윗.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습니다. 다윗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의 족보에서 강조되는 여인들을 살펴보면 결국 이렇습니다.
다말, 라합, 룻 - 하나님이 함께해준 사람들 우리야의 아내 - 죄를 용서받은 사람
이들이 유대인의 족보 한가운데 박혀 있습니다.
유대인의 민족적 자부심과 선민사상
마태복음은 유대인은 하나님이 함께해준 사람들이었고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이 그들에게 소개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은 이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 (마1:21)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
유대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진정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20)”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 가운데 거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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