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디디, 인도에서 살고 사랑하기] 인도에서 인도까지

Categories: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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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 외대이문 정유선

 

써빙프렌즈 파견 단원
인도 하이데라바드


 

 안녕하세요. 저는 열방의 미니어처 외대이문 정유선이라고 합니다. ^^ 현재 인도 하이데라바드에서 아이들과 함께 사는 누나이고, 에이즈 사역에서 일하는 언니이기도 해요. 동시에 써빙프렌즈 파견 단원이기도 합니다. UDTS 받고 대표리더 하며 착실한 대학사역 학생으로 있던 제가 이렇게 다채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이야기를 하려면 3년 전으로 돌아가야 해요.

 

 

 

2012년이 끝나가던 추운 겨울,

저는 ‘막막함+두려움+외로움+불확실함’ 안에서 떨고 있었습니다. 분명 프랑스어 전공으로 입학했는데 주변에서 제 전공이 뭔지 잘 모르고 그냥 예수전도단 걔, 로 통하던 때. 부족한 체력과 시간, 점점 많아지는 공부량과 할 일들, 서서히 프랑스로 발걸음을 옮기는 동기들, 그 안에서 적당한 선택과 집중을 하며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을 찾아야 했는데 그게 제겐 참 어려웠거든요.  게다가 통과의례처럼 들어간 진로 상담 수업에서 저는 그전까지는 볼 여력이 없던 문제를 진단받게 됩니다.

저 같은 학생이 진로 잡기 제일 힘들다는 말이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은 차라리 때 되면 취업 준비하는데, 저처럼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만 많고 그게 다 뜬구름 수준일 뿐 뚜렷한 밑그림은 하나도 없는 사람은 이거 할까 저거 할까 계속 고민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기 딱 쉽다는 거였어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서 정곡을 찔렸고, 그 동안 배운 것들이 진로에 어떻게 녹아 들어가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 고민만 깊어졌습니다.

 

 

 

그러다 2012년 12월 26일 저는 인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빠질 수 없는 우리의 소중한 겨울 일정, 전도여행이죠. 저희 캠퍼스는 써빙프렌즈 팀이었고, 인도 하이데라바드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에이즈 사역도 하고 오는 거라던데 사실 그때는 감이 잘 잡히지 않았어요. 결국 ‘멘붕’ 상태로 캐리어를 대충 싸서 질질 끌고 떠났습니다. 개인적인 약속의 말씀도 비행기 안에서야 뒤적뒤적 구하기 시작했어요.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사1:17)

 

저는 그렇게 인도와 처음 만났습니다. 하이데라바드, 제겐 너무 낯설었던 이름의 도시에서. 진짜로 고아와 과부를 만나게 될 거라는 것도, 그들을 만나러 인도로 다시 오게 될 거라는 것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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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대한 첫인상은 저 자신의 무지였습니다.

엄청난 생소함. 그리고 피로. 팀원들 모두 피곤했지만 제가 제일 피곤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 없이 서울에서 입던 기모 청바지를 그대로 이 여름 나라에 싸 들고 온, 반팔 하나 가져오지 않은 사람은 저밖에 없었으니까요! 결국 맥을 못 추는 저희를 배려하신 현지 선교사님들께서 하루의 휴일을 주시며 ‘성경 읽고 쉬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하지 마라’ 는 훌륭한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그 시간에 저는 그동안 했던 고민의 답과 앞으로의 발걸음에 대한 이끄심을 찾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요.

문제의 기모 청바지를 날려버릴 듯이 벗어 던지고 누워, ‘날씨 리서치를 해준 걸 보고도 짐을 이렇게 싸온 내가 멍청이지.’ 하고 부글부글 끓는 속으로 잠을 청할 때 제 안에 한 가지 울림이 있었어요.

 

“누군가 헐벗은 것을 보았을 때 이렇게 끓는 마음을 가졌던 적이 있던가?”

 

‘없는데요.’ 그러자 대답이라도 하듯 마음 안에 여러 가지 생각이 쏟아졌어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고아와 과부, 하나님의 공의… 정의란 무엇인가? 에이즈 환자들을 섬기면서도 어려움을 겪는 현지인 가족의 이야기에 별 생각 없었던 저 자신도. 그리고 누군가 마음에 살짝 덧붙인 한 마디가 따라 붙었습니다. “유선아, 이 땅에 다시 오겠니?” 주님 우선 지금은 푹 자겠습니다. 내일 얘기하죠. 그리고 다음 날, 팀이 오픈워십으로 보내는 시간에 저는 매우 결연하게 앉았습니다.

 

 

 

제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마음이 쏟아졌습니다.

인도에 다시 와서 에이즈 환자들을 섬길 것, 발렌티어인 동시에 써빙프렌즈 파견으로 올 것, 진정한 공의가 무엇인지 배우는 시간이 될 것, 생각보다 내가 그리던 인생에서 많이 멀어지지 않는 길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인도에서 보내야 할 시간은 2년이라는 것. 그리고 가정의 지지와 후원을 받으며 오게 될 테니 가정에 숨기거나 의견 다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많이들 환상을 품는 인도여행조차 동경해 본 적 없으며, 막연히 언젠가 프랑스나 캐나다로 가서 프랑스어 공부를 하겠지 정도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인도 버스에서 여대생이 무자비하게 성폭행 당한 사건의 여파로 ‘인도 성폭력’ 관련 기사가 하루 하나 이상 포털 메인에 오르던 때였습니다. 잠깐 전도여행 다녀오려 허락 받는 일도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 집에서 지지와 후원을 하며 그래 2년 다녀와라 하고 보내주실리가요.

그러나 주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일에 서툰 저 같은 사람조차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 만큼, 그 음성은 명확하고 확고했습니다. 매우 선명하고 세세한 음성이었지만 그 선택권은 저에게 있고, 인도에 오지 않아도 주님은 저를 기뻐하신다는 마음까지 포함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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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2주,

저는 아이들과 온전히 듬뿍 사랑하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헤어지는 슬픔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전도여행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저는 캠퍼스 간사님부터 시작해서 권위자들과 마음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현지 선교사님, 그리고 써빙프렌즈 간사님들께서는 인도를 사랑해 본 적도 없고 에이즈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 한 여대생의 말을 가볍게 듣지 않으시고 잘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13년 10월, 정말 인도에 왔습니다.

어느새 하나님이 약속하신 2년이 끝나가고 있고, 그 2년 내 저는 가정의 지지와 후원을 받았으며 하이데라바드 YWAM 선교사님들의 뜨거운 열정과 헌신, 써빙프렌즈의 탁월한 접근성과 전문성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며 배울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돌아볼수록 더없이 감사한 시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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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그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드리려 합니다.

제가 같이 사는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지, 여기서 만난 에이즈 피해 가정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이곳 하이데라바드에서는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그 이야기를 함께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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